JTBC월화드라마 '라이프'가 오늘 종영했다.
12시 10분 정도까지 하던 드라마가 편성표 상으로는 12시 50분까지 잡혀있었는데,
이는 같은 작가의 전작인 '비밀의 숲' 최종회와 같은 상황이다.
그때도 최종회는 방송시간이 길었다. 이유야 어쨌든 재미있는 작품이었으니
개인적인 불만은 없다.
출처: JTBC.조인스
전작 비밀의 숲을 통해 또 한 명의 괴물작가 탄생을 알렸던 이수연 작가의
두 번째 미니시리즈였다.
개인적으로 이와 비슷한 느낌의 괴물작가 등장이라고 느꼈던 건
'추적자'의 박경수 작가가 등장했을 때였다.
박경수 작가는 무거우면서도 날카로운 촌철살인의 대사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숨막히는 구성으로 확실한 존재감을 뿜어내며 방송가의 한 자리를
차지했다.
출처: 조인스닷컴
그때 나는 한창 미드식 대사구성을 공부하던 때여서 박경수 작가 대사의 위력을
느끼며 큰 자괴감을 느꼈다. 다행히 그가 나보다 어린 사람이 아니며 원래
실력이 있었고, 많은 노력을 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조금 안심했다.
동시에, 나는 물론 다른 어지간한 작가들도 대사를 확실하게 쓰지 않으면
박경수 작가의 대사와 비교 되어 비웃음을 살 거란 예감이 들었다.
지금도 박경수 작가의 대사에 견줄 만한 작가는 거의 없다.
굳이 꼽자면, 결이 다르지만 그나마 김은숙 작가 정도랄까...
어쨌든 한동안 박경수 이상 가는 신인 작가는 나오기 힘들겠다 생각했었다.
그러다 별 기대도 없이 조승우만 보고 한 번 봐볼까 했던 드라마가 이수연 작가의
'비밀의 숲'이다. 나뿐 아니라 대부분의 시청자들이 그랬을 거라 생각한다.
1회를 보며 살짝 갸웃 했을지 몰라도 뭔가 느낌이 왔다. 당시 언론에서도 그렇고
지금 인터넷을 봐도 글 좀 잘 쓰는 평론가들의 의견은 거의 비슷하다.
'밀도가 높다'
이수연 작가의 작품이 갖는 최대의 특징은 바로 '밀도'다.
정말 쫀쫀하고 쫄깃한 걸 넘어 빈틈 없이 꽉 찬 느낌을 준다. 물론 배우들의 호연도
있고, 연출과 제작진의 노력도 있음은 말할 필요가 없다.
출처: 연합뉴스-TVN 제공
위 사진이 나온 기사의 제목은 '8주간 안방에서 영화 잘 봤습니다'였다.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07/31/0200000000AKR20170731029200005.HTML
그래도 이수연 작가의 대본이 없었다면 비밀의 숲은 그저 범작에 지나지 않았을 거다.
좋은 원작에 나쁜 연출은 있어도, 나쁜 원작에 좋은 연출은 없다는 말이 있다.
우리가 좋았던 작품이라고 하는 영화나 드라마는 우선 이야기가 좋다.
그런 작품을 쓴 작가이기에 두 번째 작품도 모두의 기대를 한몸에 받으며 출발했다.
1회에는 역시 비밀의 숲처럼 의문의 사고가 발생하며 시작 됐다. 드라마는 사건으로
시작하는 법. 모두들 기대해마지 않았다. 지금껏 보아온 의학드라마와 크게 다르지
않을 듯한 분위기를 풍기며 동시에 이수연 작가의 조금은 다른 시각과 리얼한 현실
속 병원 이야기가 적나라하게 펼쳐지겠구나 싶어질 즈음에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물론 범인을 잡는 검찰 이야기가 아니니 이동욱이 명탐정 코난이 될 수는 없겠지만
조승우가 악역으로 등장하며 이야기의 흐름이 또 바뀌었다.
조승우 실력에 악역쯤이야... 얼마나 잘할까 싶었는데 이놈도 저놈도 확 나쁜 놈이
아니고 참 좋은 놈이라고 편들기도 망설여진다.
개인적으로는 명문대 의대를 나와 의사를 하며 교수님으로 계시는 친구놈이 있어
의대와 병원 내부 이야기를 알 만큼 안다. 의료기 사업을 해서 극 중 내용과 같은
일들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분명 바뀌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선 절대 쉽지 않다.
이런 분야가 이 사회에 어디 의료계뿐이랴마는, 어쨌든 이런 소재를 계속해서
다루는 이수연 작가의 역량에 일단 감탄했다. 의료계에서 알면 무척 싫어할
껄끄러운 이야기를 정면으로 빵빵 쏘아댔다. 통쾌하지만 동시에 시청자들은
(어느 칼럼의 표현을 빌자면)마음 둘 곳을 잃었다.
비밀의 숲처럼 적나라한 현실 속에서 올곧은 선(善)을 따라가고 싶었던
시청자들은 이동욱과 조승우 중 누구를 응원하며 누구에게 몰입해 드라마를
봐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로 인해 작가에게 실망하고 작품에 대한
재미를 못 느껴 이탈하는 시청자도 꽤 있었다고 본다.
톨스토이가 그랬다.
가장 좋은 이야기는 좋은 편과 나쁜 편을 대립시켜서는 나오지 않는다.
좋은 편과 좋은 편이 맞붙어야 좋은 이야기가 된다
상국대병원 의사들과 구승효 사장 모두 백 퍼센트 좋은 편 같지는 않지만
여튼 각자의 사정으로 자신들의 것을 지키려 한다.
그러다 보니 전 병원장 이보훈의 죽음은 사라져 버렸다. 사라져 버린 듯한
느낌인가? 어쨌든 그의 죽음은 맥거핀이었나 보다.
길어진 최종회 뒷부분에 관련한 이야기가 나오긴 했지만 살짝 개운치는 않다.
부원장의 회상을 통해 그가 이보훈을 죽이지 않았다는 암시를 주긴 했지만...
비밀의 숲 최종회에서 유재명 배우가 소름끼치게 무서운 명대사로 우리에게
경고한 것처럼 라이프에서도 어제 오늘 무서운 대사들이 나왔다.
지금 바뀌지 않으면, 바꾸려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시의성을 따진다면 라이프도 비밀의 숲처럼 높은 점수를 줄 수 있겠다.
단순한 재미만을 생각해 보면 살짝 낮을 수도 있고...
예진우 선생의 눈에만 보이는 동생의 존재를 알기까지 약간 시간이 걸린
시청자들도 있을 거다. 그런 면에서 보면 확실히 라이프는 불친절한 드라마라는
생각도 든다.
라이프는 쉽지 않은 소재를 깊은 통찰력과 뛰어난 필력으로 촘촘하게 채워내
한국 의학계와 우리 사회가 직면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보였다.
그럼에도 답을 줄 수 없는 건 드라마이기 때문인가 보다.
명쾌한 해결은 도리어 억지스런 장면을 연출해 작품을 망쳤을 게 뻔하다.
라이프는 이상과 현실 사이의 적절한 타협으로 개연성 있는 엔딩을 그린다.
여기서도 어설픈 열린 결말이 아닌 마침표를 딱 찍어주는 해피엔딩이다. (일단은)
정말 다행이다. 이수연 작가의 필력을 다시 한 번 보여준다.
이수연 작가
출처: 사진 속
쓰고 보니 리뷰 아닌 리뷰 같기도 하고, 뻘글 같기도 하다.
그래도 몇 달 동안 블로그에 접속하지 않던 게으름뱅이를 이렇게 긴 시간
포스팅하게 만든 걸 보면 확실히 라이프는 힘 있는 작품이다.
앞으로 방송될 의학드라마들을 생각하면 라이프가 보통의 의학드라마가 다루지
않는 이야기를 다룬 게 다행스런 일이라 여겨진다. 문득, 라이프는 의학드라마가
아니었다고 느껴진다.
라이프는 '병원' 자체의 이야기를 다룬 '병원드라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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